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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
북인도 20일 여행후기
박순덕 댓글 0
여행기간 : 2020-01-05~2020-01-25          여행국가 : 인도          여행도시 : 델리 바라나시 아그라





처음 인도 인디라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해 귀가찢어질것같은 오토릭샤와 자동차 경적소리, 매연 그리고 골목에서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검은 비닐을 우적우적 씹어대는 소들...


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똥밭을 디디며 내가 여기를 왜 5년 동안이나 못 와서 안달을 했는지 계속 속으로 ‘내가 미쳤지. 미쳤어.’를 외쳤다.

델리에서는 매캐한 매연과 미세먼지 때문에 계속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고 수많은 거지 떼와 호객행위 무리들이 단맛에 꼬이는 파리 떼처럼 우리를 쫓아 다녔다.

델리에 이어 바라나시에 도착했을 때도 여행 초반의 나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고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돗힌 듯 인도사람들을 틈만 나면 경계하였다.

바라나시에서 우리가 머무는 숙소가 갠지스 강이랑 거리가 있어 우리 팀은 두 대의 택시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큰 택시는 고대장과 6명의 팀원이 작은 택시는 나를 포함한 4명이 한조가 되었다.

우리차 운전기사 이름은 ‘라주’였는데 자신은 36살이고  이슬람교를 믿고 자신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대에도 바라나시에서 운전을 하여서 안전은 걱정 말라고 자신했다.

누구에게도 영어를 배워본적이 없어 서투르지만 열심히
관광객들을 만나며 영어를 배웠고 집에 가서 딸아이의 영어도 자신이 가르친다고 했다.

운전하면서 여기저기 길거리, 교회, 사원 등 소개도 많이 해주었다.
그런데 한곳을 지나며 여기는 이슬람사람들이 집중해서 많이 사는 곳이고 여기서 생산된 실크는 인도에서도 아주 유명하다고 정말 품질이 우수하다고 얘기한다.

유달리 길고 장황하게.
그러거니 했는데 그 얘기를 갠지스 강에서 소원을 담아  등잔 띄우고 뿌자의식을 보며 인도문화에 대한 생각이 막 깊어 질려는 무렵 차안에서 또 했다.

‘역시 장삿속이 있어’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날 라주는 인도는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다고 하면서 자신은 팔천 루피 밖에 못 벌고 이것으로 다섯 명의 딸과 한명의 아들과 아내가 함께 생활한다고 지금 생활이 매우 힘들다고 했다.

갠지스 강에 몸을 축이면 이생에 죄를 씻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이곳 바라나시, 죽을 때 소원이 갠지스 강에 죽는 것인 바라나시에서도 돈 앞에는 장사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주가 고대장에게도 자신의 이슬람인 집성촌에 대한 실크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그곳에 들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건성으로 훑어보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모두 나와 버렸다.

우리는 일정대로 새벽에 갠지스 강의 사이베리언버드의 군무, 목욕하는 할아버지, 빨래하는 여인들, 화장하는 모습 등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고대 문명이 21세기에 현존할 수 있는지 다소 비현실적인 문화의 이질감에 빠져들었다.

라씨 집에서 라씨를 먹고 있는 동안에도 고급 비단을 덮어씌운 시체를 어깨에 멘 여러 무리가 지나갔다.

택시를 타고 호텔을 오는데 라주는 말이 없었다.

나는 ‘우리가 물건을 안 사줘서 삐졌나?’ 이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고대장을 통해 들으니 라주가 도움이 못되서 굉장히 미안해 했다고 한다.

다음날은 우리의 바라나시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헤나도 하고 펀잡도 사서 입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카주라호로 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역으로 갔는데 문제가 생겼다. 카주라호행 기차가 서는 역이 달라진 것이다. 그것도 간밤에.

아직도 홈페이지에는 예전 역으로 적힌 상태로. 대장도 우리들도 일제히 멘붕상태가 왔다.

그 때 택시 운전사들이 역에 전화하고 자기들끼리 전화를 해대며 상황을 알아봐 주었고 혼잡한 시내 한복판에 있는
역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주었다. 가까스로 기차역에 닿았는데 또 시간이 문제.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우리는 캐리어를 들고 달려야 했다.

힘에 부친 몇몇 팀원이 뒤로 쳐지는 순간 다시 그 택시 운전사들이 캐리어를 끌고 달려 주었고 우리가 타는 칸에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짐을 올려 주었다.

고대장이 너무 고마워서 돈을 건넸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돈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다’ ,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기차는 거의 전세 내다시피 비었다. 정보를 전해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지 싶다.

고대장도 인도 여행 17년 만에 이런 일을 처음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슬아슬했던 그 순간을 여행 내내 얘기하며 ‘라주’를 떠올렸다. 사진이라도 한번 찍을걸~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세기적인 사랑의 작품 타지마할에서의 추억도 좋았다.

별이 눈처럼 쏟아지던 자이살메르 사막투어도 너무 좋았다.

카주로호의 야한 조각상도 좋았고 우다이푸르에서 보트타며 본 시티팰리스는 베네치아에 온것같았다.

하지만 나는 바라나시에서 ‘라주’와 같이 오해와 화해가 겹쳤던 몇 장면을 기억한다.

바라나시로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어떤 어려움이라도 있으면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하던 신혼여행 갔다 온 인도부부,

아그라로가는 기차에서 인도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인도의 기본 교육에 대해서 얘기해 주던 지적인 여교사,

타지마할 서문근처를 아침에 산책하다 우연히 방문한 초등학교 교정에서 본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수줍음, 그리고 영어를 전공하신 교장선생님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

아그라로 가는 기차에서 무거운 우리들의 캐리어를 기꺼이 내려주던 독일친구, 일본친구, 인도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매연과 오염과 오물로 얼룩진 인도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런 여행이 가능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소년처럼, 오빠처럼, 아빠처럼 우리를 지켜주고 사진찍어주고 질문에 답해주고 인도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주신 고인석 대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인더월드와 한 번도 함께 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진짜구나 싶다.


내가 지금까지 한 어떤 여행보다 스펙터클했고 웃음이 많았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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